피엘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프랑스 리모지에서 1841년 2월 25일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1845년에 파리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어린 르누아르의 친구들은 루브르의 마당에서 놀았습니다. 어린 시절 파리와 파리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깊은 애정이 싹터 갔고, 이것이 파리생활에 대한 인상파 그림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르누아르는 도자기의 장식 그림을 많이 그려왔는데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1850년대에 들어 약 20개의 벽장식을 그렸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을 위한 병풍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으로 상당한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따분하면서도 자신의 원칙과 맞지 않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1862년 글레르의 화실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 당시 프랑스의 미술은 두 가지 범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요, 르누아르는 들라크로아를 추종하는 편이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는 반항적인 들라크로아의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점과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기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밤마다 화실에 남아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실에서 보기 드문 진지한 학생이었던 시슬리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자주 열띤 토론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1863년에는 프레드릭 바질과 끌로드 모네가 화실에 왔습니다.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글레르 및 보자르 화실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결국 모네는 세 사람들에게 이 화실을 나가서 교외의 야외 화가들과 합류하기를 권유했습니다. 르누아르와 바질은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바질은 부유한 미술 애호가와 문화 혁명의 권위파 사람들을 르누아르에게 소개했습니다. 이를 통해 보들레르와 마네를 만나게 되었고 까미유 피사로와 폴 세잔도 바질에 의해 화실에 소개되었습니다. 르누아르는 가족 배경이 비슷한 파사로와 친해졌습니다. 세잔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중산층을 경멸하고 가족의 도움도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세잔도 들라크로아의 색채에 대한 격렬한 찬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림이란 즐겁고 아름다운 유쾌한 일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던 르누아르는 화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돈도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글레르의 화실이 문을 닫은 후 시슬리와 함께 백마관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평소 너무나 존경하고 있었던 풍경화가인 디아즈와 만나게 됩니다. 자산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르누아르는 디아즈로부터 여러 가지 조언을 얻게 됩니다.
1866년에는 당시 가장 혁신적 화가였던 쿠르베르 만나게 되었고, 작품 ‘안토니가의 모친’에 그 영향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르누아르는 모네와 함께 거리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무렵의 모네는 인상파의 미래 색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바질을 제외한 글레르 출신 화가들은 매우 가난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질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바질과 르누아르는 파리의 바티뇰로 자리를 옮겼고 마네와 자주 만나 함께 늦도록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자카리 아스트륙은 ‘양산을 든 리즈’ 작품을 극찬했는데, 인물에 표현된 우아함과 섬세함, 특히 빛의 사용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르누아르에게 기쁨과 재정적 도움을 주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미래 스타일의 예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때 그의 양친이 은퇴하고 살고 있던 다부레이 마을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때가 르누아르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릴 수 있었고 많은 예술가 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건강한 여인들과 함께 마시고 춤출 수 있었던 즐거운 밤의 기쁨 등 이러한 것들은 르누아르의 생활의 기쁨인 동시에 그의 작품 가운데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로서의 르누아르
1870년 발발한 독불전쟁으로 인해 화실의 화가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잔은 남프랑스로 떠나고 모네와 시슬리, 피사로는 영국으로 갔습니다. 파리에는 바질과 르누아르만 남게 되었습니다. 부대에 징집된 르누아르는 전쟁 중 실전에는 참가한 적이 없었지만, 바질은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로아브 부대에 합류 후 4개월 만에 전사하게 됩니다.
파리가 전쟁에서 소생하기 시작할 무렵 예전의 친구들도 모네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모이게 되고, 인상파의 문턱에서 새출발을 하게 됩니다. 1872년부터 1883년은 르누아르에게 있어 인상파 화가로서의 시기입니다. 모네의 작품 보다 더 환희에 차 있었고 더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영국에 있었던 모네, 피사로, 시슬리 등은 미술상인 폴 뒤랑 뤼엘을 만났었는데 폴은 이들의 그림을 구매해 주었고 동시에 런던에서 전람회를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의 판매는 좋지 않았습니다.
1874년 4월 15일 이 화가들의 모임은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최초의 전람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네, 르느와를, 시슬리, 부댕, 피사로, 드가, 세잔 그리고 모리소 등의 그림들이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중도 비평가도 그들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았고 실망은 컸습니다. 전람회는 실패했고 화가들은 다음 해 다시 전람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이들의 작품을 경매에 붙이기로 제안하게 됩니다.
주요 작품들
본 글에 소개된 시절의 르누아르의 주요 작품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양산을 든 리즈
26세가 되던 해의 작품으로 인상파 그룹이 모이기 시작하던 무렵 들라크로아, 쿠르베 등의 영향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화가로서의 출발점인 작품
1867년 캔버스 유화. 에센 폴크왕 미술관 소장
독서하는 아가씨
인상파 시대의 작품에는 여인을 주제로 한 명작들이 많다. 젊은 시절 작가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75년 경 캔버스 유화.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초원의 비탈길
밝은 햇살에 명랑한 풍경을 그린 작품. 부드러운 풍경의 색감 속에 붉은 꽃과 우산으로 포인트를 주었고 르누아르만의 독자적인 풍경화 구도 및 색감이 잘 나타나 있다.
1875년 캔버스 유화. 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이번 글에서는 르누아르의 생애와 인상파 화가로서의 역사를 다뤄봤는데요, 다음 글에서는 작품을 경매에 붙인 그 결과와 사랑과 결혼, 화가로서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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