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 du moulin de la Galette> '물렝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작.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인상파 걸작 중 하나로, 파리 몽마르트르의 일요일 오후 풍경을 그리고 있다.
망한 경매와 새로운 인연
1875년 3월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 그리고 모리소는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경매를 진행했습니다. 결과는 대실패. 하지만 경매장에서 만나게 된 쇽케씨는 하급 관리였지만 르누아르의 작품을 사들였습니다. 자기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 쇽케씨는 경매에서 큰 실패를 겪은 르누아르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게 되었습니다.
경매에 참관했던 후원자들로부터 작품의 의뢰가 있었는데, 그중 클라피송은 가족의 초상화를 부탁하며 거액의 돈을 지급했습니다. 이후 르누아르는 몽마르트르로 집을 옮기고 성 죠오지가에 스튜디오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몽마르트르에서의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거리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르누아르는 1870년대의 파리를 즐겁고 유쾌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로 가득 찬, 화려한 색깔의 의상과 춤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도시로 그려나갔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밝은 빛과 태양과 음영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그림을 그렸고 그림의 주제도 다양해졌는데 초상화, 집단 구도, 꽃의 아름다운 배치 등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꽃을 그림으로서 나는 나의 머리에 휴식을 주게 된다. 꽃을 그리게 되면 나는 캔버스를 망친다는 두려움도 없이, 대담하게 가치를 형유하게 된다
경매에 망한 화가들은 다음 전람회를 준비했습니다. 전람회는 뒤랑 뤼엘의 화랑에서 개최하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전람회였습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아직도 실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는 가장 최선의 작품들이었으며 <갈레트의 풍차>, <샤르펜티에르 가족의 초상화>, <여배우 쟌느 사마리의 초상화> 등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르누아르
<샤르팬티에르 가족의 초상화>는 1879년 살롱전에 출품해서 많은 인정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이를 계기로 후원가 폴 베라르를 만나게 되었고 곧 친구가 됩었습니다. 수년의 노력 끝에 르누아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그림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알제리아 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여행에서 상당한 자신감을 얻게 된 르누아르는 가정적으로 안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래의 아내가 될 알린 샤리고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14세였을 때입니다. 그들은 교외 식당에서 자주 만났었고 우정을 쌓고는 있었지만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1881년 여름에 그는 사랑에 빠져 있었고, 사랑하는 장소에 있었습니다. 르누아르의 걸작품 <노 젓는 사람의 점심 식사>에서는 그가 느낀 인생의 풍요로움이 나타나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영혼의 탐구를 위한 여행길로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여행에서는 색채와 기법에 대한 실험을 하고 베니스의 운하를 보고 바그너의 초상을 그리도록 위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파리 북부 지방을 여행하면서는 세잔과 만나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그림에 있어서 세부를 단순화하고 감정의 표현을 완성하기 위해 태양 아래서 야외 풍경들을 그렸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르누아르는 알린에 대한 생각만이 가슴에 차 있었습니다. 둘은 결혼을 하고 시실리 섬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후 몽마르트르의 화실에서 새살림을 차렸고 알린과의 만족스러운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림에 대한 불만족은 여전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자질을 믿을 수 없었고, 오랫동안 자신의 작품, 결점과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는 루브르를 다시 찾아가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였으며 이 시기의 그림은 초기의 관능적 묘사보다는 거칠고 선형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고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실험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술적 성공과 인생을 즐기는 마지막 기회
1895년 오랜 세월 동안 고군분투 끝에 새로운 스타일을 찾게 되었습니다. 색채는 명랑하고 격조는 밝고 고요했습니다. 작품마다 데상의 완벽성과 섬세한 색채의 조화성은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당시부터 나체화의 제작이 시작되었는데 함께 하고 있었던 두 부인이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이후 파리 화상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성공이 찾아왔습니다. 1904년 63세가 된 르누아르에게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의 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영광도 찾아왔습니다.
1908년은 붉은 색채의 시기였습니다. 작품마다 붉은 색채가 있었고 인생의 경이를 즐기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1912년에는 류머티즘의 통증과 손발의 마비가 찾아왔습니다. 수술을 통해 일부 회복은 되었지만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75세가 되었을 때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팔에다 붓을 고정하고 무릎에 팔레트를 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16세의 처녀 모델 앙드레를 그리기 시작했고 르누아르는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소생은 1919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루브르에 참관해서 자신의 많은 작품들과 예전 인상파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살롱전에도 인정받지 못하다가 결국은 국가의 영예를 받아 루브르에 전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한층 더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폐렴에 걸린 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을 그리고 그림을 본 사람들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것을 고집했던 르누아르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LA LOGE>, '음악회에서'
1880년 캔버스 유화. 매사추세츠 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소녀의 아름답고 참신하며 순진 무구함에 매료되어 이들을 대상으로 자주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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